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몬테카시노 전투 (문단 편집) == 상세 == [[파일:mt0.jpg]] 당시 온전했던 [[수도원]]의 모습 [[http://blog.naver.com/pzkpfw3485/70189327167|당시 사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를 포기하되 [[로마]]는 계속 수중에 넣은 상태로 유지하고자 지연전을 수행하며 서서히 후퇴하고,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독일군은 '[[https://en.wikipedia.org/wiki/Winter_Line|구스타프 라인(혹은 윈터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에 도달한 후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방어하려고 독일 공수부대를 급파했다. 독일 공군 제1공수[[사단(군대)|사단]]은 전선에 도착하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몬테카시노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몬테카시노산에는 [[가톨릭]]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어하면 연합군의 진격을 능히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은 [[중세]] 시대에 지어진 유서깊은 수도원으로[* 서기 529년 베네딕토회를 창설한 성 [[베네딕토]]가 직접 세운 베네딕토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면서 유럽에서 체계적인 수도원을 구현한 최초의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전 세계에서 11곳 밖에 없는 [[교황청]] 직속 자치수도원이기도 하다.] 가치 있는 고문서들도 많은 중요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원수(계급)|원수]]는 부대에 "수도원에 손 끝 하나라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연합군 지휘부에도 방침을 전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연합군은 적군의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수도원]]이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라 거슬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구조를 대략 알 수 있는 문서를 연합군이 입수했는데, 돌로 된 외벽의 두께만 3m에 육박하여 어지간한 [[야포]] 따위로는 이빨도 안 먹힌다는 것에 다들 경악했다. 결국 연합군 상층부는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관측병이 수도원까지 올라와서 관측할지도 모른다.'는 둥 핑계를 들어 수도원에 포격과 [[융단폭격]]을 가해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수도원 인근에 수도원보다 더 관측에 유리한 봉우리들이 있었기에, 독일군 입장에서는 굳이 연합군에게 잘 보이는 수도원에 자리잡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 무리하게 폭격을 감행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이 이탈리아의 험악한 지형을 끼고 [[우주방어]]를 폈는데, 이를 억지로 뚫고 지나가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진격속도가 느린 데 비해 [[보병]]의 손해가 엄청났다.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어느 육군 [[대령]]은 "이런 험악한 곳에서 연이은 혈전에 지친 병사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김영옥(군인)|김영옥]] [[미합중국 육군]] [[보병]] 대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당시 수도원 안에는 [[수도자]]들과 부상당하거나 피난온 [[민간인]]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케셀링 [[장군]]이 수도원을 방어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예하 부대에 명령을 내렸고, 자신들이 수도원에는 부대를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합군에 통보하기까지 했다. 대수도원장([[아빠스]])은 [[미군]]이 뿌린 폭격예고 [[삐라]]를 보고 부랴부랴 피난행렬을 꾸렸지만, 행정상의 착오인지 조급증이 난 미군의 무리한 작전개시인지 몰라도 삐라에 예고된 날보다 일찍이 미 [[육군 항공대]]의 [[B-17]]이 폭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https://de.wikipedia.org/wiki/Julius_Schlegel_(Offizier)|율리우스 슐레겔]] 공군 공수 [[중령]]이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 지하로 옮겨놓은 중세 필사본 서적 등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미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 소실은 방지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전후 조금씩 정정되었는데, 1969년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 육군 공식 문서는 '폭격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아무튼 수도원이 박살났으니 더 이상 방어거점으로서 작동을 못하면 그나마 [[미군]]에겐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튼튼한 요새였던 만큼 아무리 폭격으로 두들겨 패도 폐허가 남았고, 이 폐허가 보병에게는 매우 유용한 [[은엄폐]]를 제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눈치 볼 게 없어진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수도원의 폐허 속에 더욱 더 튼튼하고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연합군은 [[공습|항공 지원]]과 [[포병|포격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공세를 가해도 거점을 점령하지 못하고 번번이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수도원 폭격은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 적군에게 헌납한 셈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급해진 연합군은 이 지역을 무슨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돌파하기 위해 기존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을 계속해서 더 투입하였다. 자신들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연합군 측도 정예부대였는지라 한 번은 양측의 전선이 10 m까지 좁혀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철수 후미를 경계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연합군 정예부대들 간 '''자존심 싸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연합군 부대 중에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 육군 제2[[군단]]은 특히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보복심이 뼛속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 제1공수사단의 한 [[소대장]] '하인츠 베르거'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계속해서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프랑스 육군]] 원정군단(FEC)에 소속된, [[모로코]]의 [[구미에]] 산악병들은 고향이 험한 산악지형이라 몬테카시노 산 정도를 등반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연합군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한 산악지역 전체를 감싸려 한다는 사실이 독일군 상층부에 보고되자, 케셀링 장군이 명령을 내려 독일 공수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몬테카시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더욱 대단한 것은 전투력이 손실되었을 독일공수부대는 야음을 틈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나온뒤 후퇴하는 독일군 사단 후위를 지키는 역할을 맡아 2주 가까이 연합군 추격대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지금 몬테카시노산에 재건된 수도원에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양측 [[장병]]들의 묘비가 세워져 전사자들의 넋을 달랜다. 이 전투에서 '몬테카시노의 녹색 악마들'이라는, 독일 공수부대의 별명이 하나 추가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전용 피복인 녹색 계열 배색의 위장무늬 덧옷과, 역시 일반 공군 병력들에겐 지급되지 않은 녹색 강하복 하의 덕에 멀리서 보면 이들이 녹색 덩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